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바 미사일 위기 (문단 편집) == 후일담 == 소련은 약속대로 R-14 미사일들을 수송 중이던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이미 배치된 R-12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던 [[피델 카스트로]]는 10월 28일 아침 소련으로 어떤 상의나 통보조차 없이 뉴스에서 흐루쇼프가 선단을 회항시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격노하여 흐루쇼프를 보고 게이 새끼(Maricón)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벽을 걷어차고 방에 걸려 있던 거울을 집어던지며 울부짖었다. 이후 카스트로는 소련에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온 인류가 절단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소련측의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다. 한편 분노한 카스트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소련은 쿠바에 다른 지원을 해주었다. 미사일을 철수한 뒤에도 여러 최신예 구소련산 무기들을 쿠바군에 공여함과 동시에 쿠바 주둔 소련군[* 이 쿠바 주둔 소련군은 소련군 내에선 손꼽히는 꿀보직이었다고 한다. 날씨가 온화하고 먹거리도 풍족했으며 현지인들의 민심도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21세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총알 맞는 미군이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에서 클럽 돌아다니는 미군이 있는 것과 같다.]은 계속 배치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에야 철수했다. 이후 90년대에 당국의 압박으로 출간되지 못했던 흐루쇼프 회고록의 미검열판이 출간되자 여기에 카스트로가 미국에 핵공격을 해달라는 내용이 실려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카스트로는 당황해서 그란마지를 통해 문서를 공개하며 흐루쇼프의 구라라고 주장했으나 2022년 5월에 공개된 러시아 국방부 문서고 자료에서도 카스트로가 핵공격을 요청한 것이 확인되었다. 미국은 이에 대한 거래 이행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서 자국의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들을 철수시켰다.[* 주피터 중거리 미사일이 소련의 공격에 취약했다는 내부적 우려도 한몫했다. 실제로 1962년 초 이탈리아 주피터 미사일 기지 바로 근처에 소련의 동맹인 불가리아 공군의 [[MiG-17]] 정찰기가 추락해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사일로는 고사하고 개방형 런치패드에서 발사되는 형태라 '''소련군의 핵폭격 또는 재래식 폭격에 매우 취약했다.''' 결국 철수된 주피터 미사일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고 1963년 이후부터 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튀르키예 역시[* 앞서 말했지만 이탈리아의 판파니 총리는 주피터 미사일의 협상용 철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인류의 존망과 제3차 세계 대전 앞에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대신에 튀르키예와 이탈리아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쿠바에서의 폭격기 전력과 해군 기지는 유지했고 그 덕에 냉전 시기에 카리브 해에서 미소 잠수함간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미국은 쿠바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소련이 붕괴된 뒤에도 지켰고 지금도 눈엣가시인 쿠바를 경제제재만 할 뿐 공격하지는 않고 있으며 2015년 재수교하는 등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쿠바와의 관계를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쿠바 입장에서 보면 주권보장은 확실하게 받은 셈이다. 쿠바는 이때 미국이 정말 '''대규모 폭격을 하고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이나 [[노스우즈 작전]], 노스우즈 작전의 후속편 격이었던 [[노스우즈 작전#s-4|몽구스 작전]] 같은 것을 보면 실제로 관련 작전이 그때까지 존재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간에 [[핫라인]]을 개설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흐루쇼프]]는 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의 철수를 이끌어냈음에도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다녔다고 비판받았고[* 특히 흐루쇼프는 자주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 케네디를 골탕먹이곤 했는데 막상 핵전쟁 위기가 들이닥치자 유약한 태도를 보인 것이 컸다.]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위신이 실추되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해 흐루쇼프에 대한 신뢰가 매우 훼손되어 흐루쇼프 몰락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 기존에 흐루쇼프를 약한 독재자로 보았던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가 알음알음 공개하고 있는 내부 문서들, 그리고 올레크 흘레브뉴크를 비롯해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가 누적되면서 사실 흐루쇼프가 무소불위의 강력한 독재자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몰락은 흐루쇼프가 196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지도부를 다시 선거하겠다고 위협하자 다른 간부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에 가깝다. 이와 관련해선 독일 학자 Susanne Schattenberg의 브레즈네프 평전과 Joseph Torigian 교수의 “You Don't Know Khrushchev Well”: The Ouster of the Soviet Leader as a Challenge to Recent Scholarship on Authoritarian Politics [[https://direct.mit.edu/jcws/article/24/1/78/109004/You-Don-t-Know-Khrushchev-Well-The-Ouster-of-the|#]] 참조. 이 사건은 미소 양국의 군비경쟁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경우 핵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재래식 해상전력의 필요성도 크게 대두되었다. 소련은 대륙 국가라는 특성상 해상전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때문에 수상함 전력은 미약한 대신 핵잠수함과 지상발진 폭격기의 장거리 대함미사일과 같은 해양거부 전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불균형적 구조로 인해 압도적인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의 수상함대에 맞서 재래전으로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나머지 전면 핵전쟁 아니면 꼬리를 내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 그리고 전면 핵전쟁은 인류멸망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불가능한 선택지였으므로 이런 일이 계속되면 소련은 미국에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전력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소련은 1991년 붕괴되었다. 물론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으므로 당장 흐루쇼프부터 "우리는 더 발이 넓은 [[해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명할 정도였고 이후 소련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의 지도 아래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냉전 후기에 이르면 세계 2위 대양 해군에 최대 규모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초거대 해군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물론 설령 소련과 미국의 해상전력이 같은 수준이라고 해도 소련 해군은 미 해군에게 웬만해서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동 동선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길기 때문이다. 대전기에 보여줬던 것처럼 미 해군은 파나마 운하만 넘으면 태평양과 대서양의 양양을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소련 해군이 대서양에 해군력을 투사하기 위해서는 흑해에서 지중해를 통한 이동이나 북해를 통한 이동 혹은 발트해를 통한 이동이 가능한데 그 셋 모두 적성국'들'을 통과해야하며 태평양에 전력투사를 위한 전초기지는 좁은 극동 군사지구가 전부이다.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도 결국 한일, 그리고 괌, 필리핀의 해역을 뚫어야만 한다. 여기에 양양의 유기적인 군사협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의 동선을 자랑하므로 한쪽에 전력투사를 하게될 것이고 그건 태평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태평양의 대소 포위망을 뚫기란 쉽지 않으며, 결국 핵무기 같은 비대칭 전력에 의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쓰시마 해전]] 시절부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러시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물론 배수량이 곧 질적인 우세는 아니고 미국엔 10척이 넘는 [[항공모함]]과 이를 호위할 대규모 수상함, 잠수함과 함재기들이 있는 이상 여전히 해군력은 미국이 훨씬 우위였다. 미국 또한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해서 결국 믿을 것은 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는 모두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을 뒤흔드는 핵전쟁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 일명 [[MAD]] 전략에 대한 믿음만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점에서는 소련의 핵전력이 여러모로 미국에 한 수 뒤졌으나 사실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소련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70년대에 이르러 미소 핵전력 균형(parity)를 달성했다.[* 흐루쇼프의 무기력함에 실망한 브레즈네프와 그의 트로이카의 미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브레즈네프 또한 [[닉슨 독트린|닉슨]]과 함께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한다.][* 1970년대 이후 소련의 ICBM 숫자가 미국을 뛰어넘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기술 격차로 인해 공산오차가 미국의 ICBM에 비해 형편없었고 제1격 시 미국의 ICBM 사일로를 격파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소련의 SS-17, SS-18, SS-19 ICBM들은 [[MIRV]]로 선회하게 되었다.] 다만 어차피 핵전쟁이 시작되면 균형이고 뭐고 인류멸망 확정이니 의미는 없었다. 한편 1979년에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인해 긴장감은 높아져 가고 핵전쟁에 대한 인류의 공포는 더해져만 갔다. 세계 대부분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대화로 해결된 것에 대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주의 초강경파들은 겁쟁이 수정주의자 흐루쇼프가 미국인들에게 평화를 애걸했다고 무척이나 한심하게 보았다. 스탈린 격하 직후 한동안은 소련의 영도권을 인정하면서 어느 정도 협조관계를 가졌던 마오쩌둥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주도권을 주장하면서 소련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처음에는 소련 정부가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는 현명한 결단을 내렸다고 갖은 알랑방구를 뀌면서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를 방어하기 위해 소련이 북한의 방공망과 해안방어를 강화시켜주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해달라고 소련 대사 모스코프스키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대북 지원에 인색하게 나오고 벼르고 별렀던 흐루쇼프의 북한 방문조차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무산되자 뿔난 김일성은 입장을 바꿔 흐루쇼프를 비웃으면서 중소분쟁 초기에 마오쩌둥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싶었던 북베트남도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에 대해서 실망을 드러냈고 레주언이 주도한 친소파 대숙청과 친중 노선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국제정치, 안보 연구에서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로 자리잡았고 사건 발생 수 년 후인 1970년대에는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이 《결정의 엣센스》(''Essence of Decision'')란 저서를 통해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대응 배경을 학문적, 이론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1) 합리적 행위자, 2) 조직행태, 3) 정부정치 등 3가지의 모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편. 예컨대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을 평가할 때 '주변국 안보 위협 증대에 따른 동맹 강화' 같은 국가를 단일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가정하는 해석은 합리적 행위자 모델, '부처 내 업무 절차 혹은 매뉴얼에 따른 행동'이라는 해석은 조직행태 모델, '정부 내의 온건파 대 강경파 경쟁'이라는 해석은 정부정치 모델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53년 후 미국과 쿠바가 국교정상화를 재개한다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표가 2014년 12월 18일에 나왔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12/18/0607000000AKR20141218006700071.HTML?template=5565|기사]] 이후 2015년 재수교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전역대상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3~5개월 가량 전역이 미뤄졌다. 이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세계의 서방과 비서방 국가들은 쿠바와 미국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 편이다. 이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1962년 중간선거는 본래 공화당의 압승이 유력했으나 케네디가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성공하고 흐루쇼프에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판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민주당이 압승했다. 하원에서는 큰 의석손실 없이 다수당 지위도 유지했고, 상원에서는 의석을 4석이나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3차대전의 위기에서 대통령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데다가 자신들의 턱밑에 깔린 쿠바의 미사일까지 철수시키고 끝내 핵전쟁까지 막아냈으니 여론은 당연히 핵전쟁으로부터 미국을 구한 케네디를 지지하자는 여론으로 흘렀던 것이다. 더군다나 위기의 종결과 중간선거까지의 간격은 고작 1주일여에 불과했으니. 위기 전에는 유약한 행동으로 미국의 위신을 추락시켰다며 까인 것과 정반대. 케네디의 유약한 대외정책을 공격하던 공화당은 말 그대로 참패했다. 별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이 사건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나름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는데 당시 유력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대부분 케네디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천명하며 반소 입장을 표명했다. [[마틴 루터 킹]], 필립 랜돌프 등은 모두 공개적인 케네디 지지 운동에 나섰고 흑인 언론들도 뒤따르며 흐루쇼프야말로 미국 내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와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극좌파는 미국이 [[제국주의]] 침략을 하고 있다고 쿠바를 지지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맬컴 엑스]]는 소련을 딱히 지지하진 않았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백인들은 흑인에게 늘 참으라고 하면서 자기네를 조금만 핍박해도 참지 못하지 않냐고 빈정댔다. 오버프루프 [[럼]]인 [[바카디 151]]을 사용하여 [[쿠바 리브레]]를 만들면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도수도 상당하거니와 바카디가 쿠바에서 창업한 가족기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